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로베우스 왕조 (문단 편집) === 로마의 봉신 === 왕조의 시조 '''[[메로베우스]]'''는 [[프랑크족]]의 일파인 살리 프랑크족의 지도자이자 [[서로마 제국]]의 봉신으로, 라인 전선 북부 일대를 이민족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맡고 보조병을 보내는 대가로 로마로부터 상당량의 보조금을 받았다. 451년 6월 20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서고트 왕국|서고트족]], 프랑크족 연합군이 [[아틸라]]의 [[훈족]], [[동고트 왕국|동고트족]], [[부르군트족]], 게피드족 동맹군을 상대로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맞붙었다. 이때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1세]]가 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고 아들 [[토리스문드]]가 아버지를 대신해 고트족을 이끌어 승리로 이끈 사실은 확인되나, 프랑크족을 이끈 지도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전투 전날 밤에 프랑크족과 게피드족이 충돌하여 15,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투 후 본거지로 돌아갔다는 것만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메로베우스가 프랑크군을 이끌어 카탈라우눔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투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킬데리크 1세]]가 뒤를 이었다고 추론하지만 불확실하다. '''[[킬데리크 1세]]'''는 갈리아 방면 로마군 사령관 [[아에기디우스]]와 동맹을 맺었고, 458년경에 아에기디우스가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지령에 따라 갈리아 북부를 장악하는 데 협조해 리옹에서 부르군트족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피살되자, 아에기디우스가 리키메르에 대항해 독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463년 킬데리크가 오를레앙에서 전투를 벌였다"라고 기술했으며, 마리우스 아벤티센지스(Marius d'Avenches)는 아에기디우스와 서고트 왕국이 오를레앙 인근에서 격전을 벌여 서고트군이 패했고 서고트 왕은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이로 볼 때, 그는 463년 아에기디우스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 [[토리스문드]]를 상대로 오를레앙에서 맞붙었을 때 아에기디우스 편에 가담하여 승리에 기여했을 것이다. 464년경 아에기디우스가 사망한 뒤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갈리아에 잔존한 로마군을 통솔했다. 그는 시아그리우스에게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갈리아 북부를 방어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469년, 앙주의 벡직 피울루스가 도시를 지배하던 [[앵글로색슨족|색슨족]] 지도자 오도바크리우스(Odovacrius)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파울루스를 도와 색슨족을 앙주에서 몰아냈고, 파울루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앙주를 그대로 장악했다.[* 다만 프레데가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파울루스를 살해하고 앙주를 탈취했다고 한다.] 이후 루아르 강 하류의 섬들을 장악하고 그곳의 수비를 자신의 친척이자 캉브레 프랑크 족의 왕 라그나카르의 형제인 리그노메르에게 맡겼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왕을 자처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오도아케르에게 복종하길 거부했고 자신은 여전히 로마의 갈리아 사령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로마 제국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서로마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노(로마)|제노]] 황제가 거부하자 교류를 끊었다. 반면 킬데리크는 제노에 충성을 맹세했고, 원정대를 파견해 오도아케르가 장악한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